세체니 다리 근처까지 간다는 86번 버스에 오를 때까지 분명히 내 뒤에 있었다. 그런데 버스에 오른 후 붐비는 승객들 사이로 돌아보니 녀석이 보이질 않는다. 사람이 많아 날 놓쳤거나 딴청 피우다 내가 타는걸 못봤을 수 있다. (말이 안되니) 중간에 세워달라지도 못하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뛰다시피 한 정거장을 급히 되짚어 갔건만 흔적도 보이질 않는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날 놓쳤어도 탈 버스 번호 알고 목적지 아니, 뒤에 오는 버스를 타고 먼저 도착해 있을지도 몰라.'
중딩이니 그 정도 융통성을 발휘했기 간절히 바라며 다시 버스를 타고 세체니 다리에 도착. 부다왕궁으로 올라가는 언덕 입구를 샅샅이 뒤져도 멀건 키의 구부정한 소년은 보이질 않는다. 심장 박동은 한 단계 더 빨라지고.. 두 가지 가능성. 하나는 그 정류장에서 나를 놓치고 허탈해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둘, 먼저 도착해 혼자 관광 나섰다. 아무래도 두번째는 낯선 곳 공포증이 있는 녀석의 선택지가 아니지 싶어 서둘러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기대와 달리 다시 돌아온 숙소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창 넘어로 들여다 보이는 방 안은 텅 비어 있다. 방 열쇠는 쟈니가 가지고 갔고 쌤의 전화번호는 방에 두고 온 수첩에 적혀 있다. 프론트에 내려가 예비 열쇠를 받아서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에 털썩. 낯선 곳에서 허둥대고 있다가 민둥머리 치한에게 끌려간건 아닐까? 요즘 스킨헤드들 외국인 혐오범죄 늘고 있다는데.. 버스를 잘못 타고 엉뚱한 곳에 내려 숙소에서 점점 먼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건 아닐까? 경찰 도움을 받는다해도 공황상태면 자기 숙소 주소도 못댈지 모르는데.. 생각해보니 쟈니는 공중전화 거는 법도 모를 뿐더러 우리 임시 휴대폰 번호도 알려주지 않았다. 온갖 불길한 상상들을 밀쳐 내고 간신히 정신을 추스려 쌤에게 전화로 상황보고, 초조하게 손톱 깨물며 기다리길 1시간여. 엘리베이터 문 철커덕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쟈니 현관에 등장. 안도의 탄식과 더불어 치미는 울화로 일단 고함 한방.
"뭐야 너!!!"
태평한 녀석의 반응.
"엄마 어디 갔었어?"
녀석의 말로는 내가 굴절버스 뒤쪽으로 타길래 자기는 앞 쪽 칸으로 올랐다고. 다음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내가 타기 직전 말해서 자기는 곧이 곧대로 다음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는데 엄마가 안보이길래 잠시 의아해하다 뭐 이왕 이렇게 된거 엄마없이 돌아다녀보자 싶어 혼자 부다왕궁 올라 여기저기 쏘다니며 구경하다 버스타고 지하철 갈아타고 숙소로 돌아온거라고. 혼자 여행다니기 미션 이 정도면 잘한거 아니냐며 칭찬해달란다. 칭찬대신 꿀밤을 한대 날려줬다.
이제 도나우 강변 쪽엔 어디다 떨어트려놔도 숙소로 잘 찾아올 자신이 있단다. 그래. 일주일만에 그 정도 익혔으면 우리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있는 것 맞다. 다음 미션은 공중전화 이용해서 나와 쌤에게 전화걸기로 정해야겠다. 십년은 너무하고 한 오년은 감수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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