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쥐 가족의 비엔나 무작정 반일 여행
부다페스트에서 2시간 40분만 차를 몰고 북쪽으로 가면 비엔나가 나온다. 이곳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외국(?) 중 한 곳이라 차가 생기면 가장 먼저 가 볼 도시로 꼽아 놨었다. 계획 없이 훌쩍 떠나 휙 둘러 볼 곳에 그 도시, '비엔나'가 있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므훗하지 않은가! 드디어 지난 주 일요일 국경을 넘는 첫 여행을 시도했다. 아무 계획도 없이... 강한 영국식 액센트로 또박또박 안내해주는 미스 톰톰(네비게이션 이름)의 친절한 멘트에 따라 M1 고속도로를 타다 국경에서 A4 고속도로로 갈아타니 어느새 도로 표지판이 독일어로 바뀌어 있다.
목표지를 시청으로 설정해 놓고 어지간한 곳 나오면 대충 주차해 놓고 점심부터 해결한 후 시내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대충 주차한 곳이 마침 빈 중심가인 Karntner 거리 이면 도로. 목표지를 찾아가면서 조금씩 비엔나라는 도시가 부다페스트와 닮은 듯 매우 다른 꼴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비엔나는 강을 경계로 구도심과 신도심으로 나뉘고 구도심에는 옛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즈막한 건물들이, 신도심에는 통유리가 번쩍 거리는 고층빌딩들이 들어서 있는데 두 지역이 의외로 조화롭다.
부다페스트의 경우 페스트 도심을 제외하고는 옛 건물과 새 건물이 그닥 조화로운 경관을 보여주진 못한다. 옛 건물은 페인트칠이 군데 군데 벗겨지거나, 2차 대전 당시 총탄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작되는 주거용 아파트는 말 그대로 성냥갑 형태로 무미건조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주로 관광객이겠지만)의 표정도 부다페스트보다 한결 밝고 생기에 넘친다. 부다페스트 사람들은 진지한 표정이 기본값이고 큰 제스쳐를 사용하거나 유머를 구사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솔직히 이 부분은 내 취향이라 그러려니 한다. 나도 그러니까. -_-;;).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들도 훨씬 세련되고 심플하면서도 감각적 디자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기에 망정이지 매우 강력한 지름신이 내린 상점도 두어 곳 된다. 부다페스트에서 고전과 근대의 허수룩한 부정교합이 느껴진다면 비엔나에서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고전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18세기와 21세기의 하이브리드 도시. (말은 그럴듯 한데 내가 써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쩝..) 아무튼 시골쥐가 서울로 상경해 휘황찬란한 문명의 세계에 머쓱하게 발을 들여놓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는 점이 중요.
비엔나 거리 인상비평은 지나가던 개에게 던져 준 후, 세 식구 모두 매우 배가 고팠으므로 허기를 채울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삐끼 총각이 건네 준 전단지에 "점심, 슈니첼(schunitzel) 1, 단돈 7 유로! 정원 있음" 이라고 씌여 있길래 두번 고민 안하고 그 식당으로 직행했는데 생각보다 맛도 괜찮고 가격도 착하고 분위기도 좋아 만족. 영어 잘 알아 듣고 잘 구사하는 식당 종업원을 만날 수 있어서 그것도 만족. 들어가는 입구는 컴컴한 바였는데 역시나 유럽풍 건물이라 건물 안쪽에 아담한 정원이 소심하게 숨어 있고 다행히 우리는 그 정원 테이블에서 식사할 수 있었던 것도 대만족. 그러나 식당 고유의 향취가 없었다는 점에서 별 세개 반.
감자튀김과 같이 담긴 것이 슈니첼, 옆에 동그란 구멍 뚫린 식기에 담긴 것은 달팽이 전채 요리. (구멍마다 달팽이가 하나씩 들어 있음). 가운데 스프볼에 담긴 것은 만두 스프. 슈니첼은 생각보다 담백했고 달팽이 요리는 생각만큼 느끼했으며 만두스프는 국물은 짜지만 만두가 심심해 입맛에 맞았고. 하우스 와인은 부다페스트보다 비싸고 양도 적었지만 그래도 한국보다는 싼 편.
부른 배를 두드리며 근처 카페에서 쟈니는 투톱 아이스크림을, sam과 나는 에스프레소 한잔 씩을 디저트로 흡입한 후 수많은 관광 인파가 오고가는 카른트너 거리로 다시 나섰다. 행인이 던져 주는 과자부스러기 쪼아먹는 닭둘기들의 시도 때도 없는 만찬과 그걸 잡겠다고 아빠 품을 벗어나 뒤뚱거리며 달려드는 아가의 모습은 비엔나라고 예외는 아닌 듯.
거리가 시작되는 곳에는 싸이트 투어용 쌍두마차가 귀와 눈을 가린 채 손님을 기다리며 일렬로 대기 중이었고 그 주변으로 다가가자 녀석들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했는데 또 이놈의 '비교비평' 본능이 꿈틀거리며 오지랖이 펼쳐졌는데.. 얼마전 청계천에서 관광객을 싣고 다니는 조랑말인지 당나귀 마차 운행을 서울시가 폐지하겠다는 입장을 두고 언론에서 갑론을박 떠들어댔던 기억. 나는 전부터 그 당나귀 마차가 몹시 못마땅했다. 우리의 '전통'에 '마차 문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차량통행이 많아 우마가 다니기 좋은 길은 더더욱 아닌데 왜 애먼 당나귀를 배기가스 가득 찬 거리 한복판에서 헐떡이며 달리게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전통을 살리려면 '가마꾼'을 두던가, 낭만을 살리려면 콘크리트 수조 말고 볼거리를 더 만들던가..
이에 비해 케른스트 거리에서 만난 마차와 가슴 근육 실한 말들은 이 도시와 매우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것이 중세 유럽 교통수단인 말과 마차는 그것이 그들 삶의 '전통'이자 '문화'이기 때문.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리에서 전통적인 교통수단을 관광상품화시키는 것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사고일 터. 아무튼 우렁찬 말발굽 소리는 경쾌했고 성별 불문 일요일도 없이 생업에 종사하는 마부들의 표정도 생기발랄하건만 녀석들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짙게 배어 있는 지독한 배설물 냄새는 전통과도 현대와도 어우러지지 못하니 이를 어쩔...ㅠㅠ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들
조금 더 걸어가자 비엔나 여행 블로그마다 걸려 있던 그 유명한 슈테판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부다페스트에도 같은 이름의 슈테판 성당이 있는데(헝가리에서는 '이스트반'이라고 부른다) 건축 양식은 사뭇 다르다. 이스트반 성당은 르네상스 양식, 슈테판 성당은 고딕 양식이다. 오히려 마차슈 성당이 슈테판 성당과 비슷한 형상이다. (아.. 이것도 공부가 짧아 각각 어떤 연유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고 어느 연대에 지어졌는지 나중에 확인할 일. ㅡ.ㅡ) 허긴, 합스부르그 왕조 300년 이상 헝가리를 통치했고 그 당시 오스트리아의 건축 양식과 예술, 문화가 헝가리 전통문화에 접목되었다고 하니 비슷한 풍모와 같은 이름의 성당이 지근거리에 있는 것이 이상할 이유는 없다. 지환이의 성화로 끌려 들어간 성당 내부는 안 들어갔으면 후회할만큼 아름다웠으나 첨탑 꼭대기가지 올라갈만큼의 의욕은 없었고.. 그나저나 수박 겉핥기로 본 부다페스트의 성이스트반 성당과 마차슈 성당도 필히 내부 관람도 해봐야겠다. 아는 만큼 본다니 공부도 좀 하고서...
슈테판 성당 내부
휘이 한번 성당 1층을 훑어보고 다시 돌아나와 보니 거리 곳곳 군데 군데 인파가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뭔 재미진 구경이 있나 싶어 발길을 옮겼는데... 곳곳에 공중부양쇼, 마술쇼, 아크로바틱쇼, 머리에 그릇 던져 올리기 쇼, 인간마네킹쇼 등을 펼치는 '거리의 예술가' 들이 모자를 앞에 놓고 구경꾼에 둘려 쌓여 저마다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으니, 그중 단연 압권은 공중부양쇼! 10분 이상을 같은 자세로 미동도 없이 서로를 버텨내는 두 사람의 내공은 가히 신화급. 윗 사람이나 아랫 사람이나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듯 보였고 움직임이라곤 가끔씩 껌벅이는 눈꺼풀만이 그들이 생명체임을 알게 해주었는데.. 처음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셔터만 눌러대던 관광객들이 하나 둘씩 다가가 윗 사람 엉덩이 밑에 손 방석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아래 사람과 윗 사람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고리, 지팡이에 비밀이 숨어 있지는 않나 만져 보기도 했으나 결국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그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방으로 호기심을 마무리하고 동전을 모자에 던진 후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이런 저런 쇼들을 낄낄 대며 구경하고 남은 유로 동전 긁어 모아 모자에 동전도 몇 푼 집어 넣으면서 배회하다보니 벌써 집에 돌아갈 시간. 뭔가 제대로 비엔나를 접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았는지만 뭐 부다페스트에서 3시간 거리, 또 오면 되지. 박물관이니 궁전이니 보려고 하는 것들 다 보고, 거기다 짤스부르그까지 한바퀴 돌고 오려면 적어도 2박3일은 잡아야 할 듯. 계획 없는 여행답게 지도와 카메라조차 가져가지 않은 탓에 사진도 얼마 건지지 못했으니 다음엔 좀더 준비를 해서 다듬어진 여행기를 올릴 일이다.
부다페스트에 둥지 튼지 고작 3개월인데 비엔나에서 돌아 나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우리를 반기는 "이리로 가면 BUDAPEST!" 간판을 보고 안도감이 드는 건 내가 적응이 빠른 탓인가, 외지의 외지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이 컸던 탓일까. 아무튼 부다페스트 시내로 접어들어 멀리 세체니와 마르깃 다리의 불빛이 아른거리는 두나강변을 달리자 서울 구경도 좋지만 나무 냄새 풀 냄새 물씬 나는 푸스터세리 우리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 침침한 가로등에서 고향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걸 보니 우리는 시골쥐 맞나 보다. 그나저나 고속도로 티켓 10일 짜리 끊었으니 다음주에도 고속도로를 밟아줘야 본전 찾을텐데 이번엔 또 어디를 무작정 가보나.. 호르토바지 악몽을 딛고 다른 국립공원에 한번 또 도전? 오케!
- 비엔나 대표음식으로, 얇게 두드려 편 돼지고기 안심 튀김. 딱 우리 왕돈까스 필이다. [본문으로]